등산/등산산행기

바람이 주는 행복

등산바이블 2016. 1. 1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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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베란다에 나가 본다.


찬 공기가 온 몸을 휘돈다.


방에 들어가 잠시 생각을 해본다.


너무 춥다. 오늘은 쉴까? 휴대폰으로 내일의 날씨를 보니 더 추워진단다.


그래, 내일 더 추워지면 진짜 못 할지도 모르니 오늘은 가자.


19시 30분이 되자 습관처럼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양말을 신는다.


바지는 평소 여름용 밀레의 쉘러 드라이스킨을 입는데 오늘은 안되겠다. 라푸마의 간절기용 쉘러 드라이스킨 바지를 입었다.


상의는 항상 입는 스켈리도의 타이트한 셔츠를 입은 후 K2의 경량 구스 패딩을 입었다. 근래에는 이렇게 입고 나갔는데 오늘은 밖에서 들려오는 세찬 바람 소리에 겁이나 할리한센의 퍼텍스쉴드 2.5L 자켓을 덧입었다.


버프로 목과 귀를 덮고 폴라텍 파워스트레치 프로로 만들어진 라푸마 비니를 썼다.


며칠 전부터 코의 인중 윗 부분이 헐어 상처가 났다. 도대체 왜 상처가 났는지 몰랐는데 한동안 고민해보니 평소 목장갑을 끼고 산을 올랐는데 코가 나오면 목장갑을 낀채로 코를 풀곤 했다. 이 목장갑이 거칠어서 코가 헐은 듯 싶었다. 그래서 좀 부드러운 장갑이 필요해 마운틴 하드웨어의 폴라텍 파워스트레치 장갑으로 바꾸었다.


수명이 다 되어 가는 K2 아라곤을 신고 집을 나선다.


좀 과하게 준비하고 나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얼굴을 때리는 찬 바람 한 방에 이내 자켓의 후드를 덮어 쓴다.

바람이 얼마나 불어대는지 분리수거로 내놓은 쓰레기들이 골목 구석구석 왔다갔다 하고 있다.


운동 관리 앱인 엔도몬도와 트랭글을 작동시키고 멜론으로 복면가왕 선곡 리스트를 틀었다.


천천히 걷다가 슬슬 뛰어 보기로 한다. 헛 둘 헛 둘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다.


땀이 나지 않도록 뛰다 걷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오다 보니 어느새 구덕 운동장을 지나고 있다.


여기서 부터 시약산 정상 기상대까지는 거리 4,000m, 고도차 500m 정도의 상당한 오르막이 계속된다. 쉼 없이 오르기 위해 페이스 조절을 잘 해야 한다.


오르막을 계속 오르다 보니 세찬 찬 바람이 온 몸을 때리는 데도 땀이 난다. 자켓과 패딩의 지퍼를 내려 환기를 시키며 계속 오른다.


너른 공터와 같은 꽃마을에 오르자마자 더욱 세찬 바람이 반겨준다.


조금 더 오르자 차단기가 내려와 있는 구덕산 임도길의 시작이다. 정말 자주 왔지만 오늘은 기대하는 것이 많다. 어제 소백산 비로봉의 칼바람을 기대하고 올랐건만 그냥 부슬부슬 내리는 싸락눈에 만족하고 왔던 아쉬움을 달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바람같은 바람을 맞고 싶다는 욕망이 컸다.


나무를 뒤흔드는 바람소리가 겁을 주듯 거칠어지더니 주례와 사상 지역의 불빛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엄청난 바람이 몸을 때린다.


아 짜릿하다.


구스 패딩과 하드쉘을 밀치는 강한 찬 바람의 힘에 몸을 앞으로 내딛는게 힘들게 느껴지자 마음 속 한 편으론 '그래 이런 바람을 기다렸어!'라는 즐거움이 바람의 크기만큼 커졌다.


더욱이 하드쉘과 그 속의 구스 패딩이 바람에 대항하여 빵빵하게 부풀어 내 몸을 보호하는 듯한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앞에서 부는 바람과 옆에서 부는 바람을 지나니 이젠 뒤에서 불어주는 바람에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바람이 잦아 들었지만 여전히 윙윙 거리는 거친 바람 소리는 내가 산에 오르고 있음을 문득 깨닫게 해줘 더욱 즐겁다.


다시 코너를 돌자 아까와 같은 무자비한 바람이 오를테면 올라와 보란 듯이 나를 강타했지만 패딩과 자켓으로 그런 바람을 비웃듯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 한 밤의 정복자가 된 듯하다.


아무도 없는 깊은 산길을 비추는 달 빛과 별 빛을 바람과 함께 맞으며 걷다보니 문득 몇 년전 여름 이 길을 내려올 때 소낙비가 내렸던 생각이 났다. 너무나 세차게 내리는 비였기에 그냥 웃통을 다 벗어 버리고 비를 즐기며 아주 천천히 내려 왔었다. 그래 그 때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몇 차례 이렇게 바람을 정면에서 옆에서 또는 뒤에서 맞기를 반복하며 오르다 보니 어느새 구덕산 정상이 가까워왔다.


트랭글에서 구덕산 배지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소리가 나지 않아 스마트폰을 보니 GPS가 아직 동아대 부민 캠퍼스에 머무른채였다. 서둘러 GPS를 껐다 켜니 이제서야 제대로 잡힌다.


바람을 느끼며 목적지인 시약산 기상대 앞까지 이동 했다가 다시 내려간다.


내리막 임도길을 달려 내려오다 보니 강한 맞바람에 몸이 잠시 붕 뜨는 것 같다.


아 너무 즐겁다.


내일도 바람이 많으면 좋겠다.


한참을 뛰어 내려오다 천천히 바람을 더 즐기기로 한다. 사실 오늘은 바람을 맞으러 왔으니 많이 맞어야지...


꽃마을을 지나고 구덕 운동장을 지나고 서대신 시장을 지난다.


천천히 걸으며 바람을 맞다 보니 이내 몸은 식어 버렸다. 다시 뛰어 볼까 했더니 한 번 식은 몸이 거부하는 듯 하다. 땀도 많이 흘렸는지 축축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다행히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 했다.


집에서 자켓을 벗어 살펴보니 땀을 흘려 젖었다가 그 중 일부가 얼어 있었다. 참 신기 했다.


물론 패딩도 흠뻑 젖어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어 샤워를 하자 온 몸의 식은 땀이 씻겨 나가며 행복한 감정이 소름돗듯 솟아 올랐다.


이러한 날씨에도 이렇게 땀을 흘리며 산을 다녀올 수 있는 건강한 현실이 기쁘고 내일 또 오를 수 있는 산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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